<인텔리겐차>, 아는 만큼 사는 삶, 사는 만큼 아는 삶

아는 만큼 살고 사는 만큼 아는 삶

아는 만큼 살고 사는 만큼 아는 삶. 이 책의 주인공들을 표현하기에 이만큼 적절한 표현이 또 있을까? 이는 동시에 내가 살고 싶은 삶의 모습이기도 하다. 완벽한 지식인의 삶.

‘아는 만큼 사는 삶‘은 어렵다. 무지 어렵다. 아는 것도 어려운데 그 아는 만큼 사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실천’이라는 단어는 발음은 가볍게 들릴지 몰라도 그 무게는 상상을 초월한다. 절대로 쉽게 짊어지고 갈 수 없는 단어. 이 무거운 단어를 그들은 묵묵하게 짊어지고 간다. 아는 것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 무게는 점점 무거워지지만 그들은 다시 묵묵하게 그 무게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는 만큼 아는 삶’은 또 얼마나 어려운가? 책을 통해서 얻은 지식도 분명히 유의미하지만 삶을 통해서 얻은 지식은 보배와 같다. 사는 만큼 안다는 것은 ‘생각’을 하며 산다는 것의 반증이다. ‘생각’을 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잡스러움으로 집어 삼키는가? 그들의 ‘생각’하는 삶은 곧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지식의 샘이 되는 것이다.

이 시대의 인텔리겐차

인텔리겐차라는 단어를 처음 들어봤다고 하면 무식한 티를 너무 내는 것일까? 처음에 이해되기에는 지식인이라는 무색무취의 단어를 떠올렸지만 책을 읽고 난 뒤에 떠오른 것은 숯불이다. 그것도 뜨거운 불을 머금고 있는 아주 쌔빨깐 놈.

이 시대의 인텔리겐차는 이래야 해, 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도 위험한 일이다. 그것은 또 다른 획일화된 생산 라인을 만들어내는 일이므로. 다양성에 대한 열정. 진리를 향하는 신나는 발걸음. 나는 이 두 가지가 전부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시대의 인텔리겐차인가? 이런 질문을 꺼내기에는 너무나도 부끄러울 정도로 어림도 없다. 지식인이라는 단어도 나에게는 사치와도 같다. 나는 그냥 학생 나부랭이일 뿐이다. 아직은. 하지만 불은 피어오르고 있다. 내 가슴 속에 타오르고 있는 무엇인가가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고미숙

가장 쉽게 이해되기도 했거니와 무언가 따뜻해 보이는 일을 하시는 것 같은 고미숙 선생님의 인터뷰가 가장 마음에 와 닿았다. 새로운 개념의 연구 공간. 삶을 나누는 것이 공부가 되는 곳. 회의 시간이 따로 없는 곳. 자유로움. 그 중심에 인텔리겐차 정신이 있다.

성찰하는 삶

인텔리겐차의 기본이 되는 것은 성찰하는 삶이 아닐까? 뒤돌아본다는 것은 새로이 앞을 향하는 것이다. 앞으로 나가기 위한 모터를 다는 것이다. 고석만 선생님이 이야기한 것처럼 성찰 작업과 새로운 방향 모색은 서로 뗄 수 없이 붙어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성찰의 중요성을 간과한다. 과거의 일은 과거일 뿐이고 덮을 것은 덮자는 것이다. 그러나 뒤돌아봐야할 때, 뒤돌아보지 않는다면 언젠가 덮어두었던 과거의 상처와 잘못들이 덧나서 큰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순간이 찾아오게 된다. 인텔리겐차들에게는 이러한 순간을 막아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실험하는 삶

아직 어린 나이의 학생임에도 새로운 것을 도전하기 두려워하는 나의 모습을 스스로 돌아보며 걱정이 될 때가 있다. 지금도 이런데 나중에 나이가 들면 더 안주하는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는 것이다.

새로운 것을 도전하고 실험하는 삶이 두려운 것은 실패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험하는 삶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이 책의 주인공들은 글로써 여러 활동들로써 끊임없이 실험하는 삶을 살고 있다. 이러한 그들의 시도들이 당장 무언가 그럴듯한 결과들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작은 실험들 하나하나가 모여서 변화를 이끌어 내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시대를 바라보는 눈

인텔리겐차는 사회를 읽고 그 시대가 요구하고 필요로 하는 가치를 앞서서 제공하는 사람들이므로 다른 사람보다 민감하게 시대의 특징을 읽어야 한다. 시대를 바라보는 눈이 필요한 것이다.

시대를 바라보는 눈을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 에 대한 고민을 끊임없이 하게 된다. 신문과 책을 많이 읽고,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의 의견을 듣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을 이 책을 읽으며 깨닫게 되었다.

아는 만큼 사는 삶, 사는 만큼 아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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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더스트>, 꿈은 이루어졌다?

내 인생의 달

케네디 대통령의 밑도 끝도 없는 발언으로 시작된 달 탐사 프로젝트. 모든 미국인들이 눈물과 감동으로 지켜보았던 달을 향한 첫 발걸음. 모든 것이 마치 영화처럼 흘러갔다. 무엇이 그들을 달로 향하게 만들었을까, 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시원하게 대답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누군가는 소련과의 자존심 대결이었다고 말하기도 하고, 케네디 대통령의 재선을 위해서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결국 모든 이유는 한 곳으로 흘러 들어간다. 바로 꿈.

<문더스트>는 달이 온 미국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처럼, 내 인생을 사로잡은 나의 꿈이 무엇인가, 스스로 질문하게 만드는 책이다. 물론, 많은 돈을 퍼부었고 많은 부작용이 발생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결과론적으로 성공적으로 달에 다녀왔으니깐 오케이, 라고 말하기에는 쉽지 않은 문제인 것이다. 하지만 모든 역경들과 고통들을 이겨내고도 이루어냈다는 것. 이것이 바로 꿈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 아닐까?

남은 자와 밟은 자

3명의 우주인이 탐사선에 오르고 그 중 2명의 우주인만 달을 밟게 된다. 그리고 나머지 한명은 홀로 사령선에 남겨져 달의 궤도를 돈다. 그런데 사령선에 남겨진 자는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실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남게 된 것이다. 실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남겨져야 하다니, 그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인생에서도 이러한 일이 적지 않게 일어나는 것 같다. 실력이 뛰어나서라기보다는 운이 좋아서, 줄을 잘 서서 좋은 위치에 오르는 사람들이 있고, 반대로 실력이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계속 불행한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운’이라는 요소가 우리의 인생에서 차지하는 부분이 너무나도 크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때이다.

사령선에 남은 자들은 달의 궤도를 도는 그 순간 무슨 생각을 했을까? 특히나 달의 뒷면으로 들어가서 지구와의 교신이 단절되는 47분이라는 시간 동안에는 무엇을 떠올렸을까? 그 극한의 고독의 시간이 그들의 인생에 있어서 어떤 의미가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겠지만 하나 분명한 것은 그들이 외로웠을 것이라는 것이다. 남겨진 자는 외로울 수밖에 없으니깐.

꿈을 이룬 후에

난 항상 꿈을 이룬 후의 나의 모습을 상상하는데, 그것은 언제나 웃음과 여유가 가득한 행복한 모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처럼 꿈을 이룬 후에 찾아오는 것은 행복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꿈을 이룬, 그러니깐 달을 거닐었던 9명의 우주인들의 삶은 정말로 제 각각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꿈을 이룬 다음에 찾아 오는 것은 행복이 아닌 새로운 인생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준비된 사람은 새로운 인생을 알차게 사는 것이고, 과거에 얽매인 사람은 계속해서 이루어진 꿈을 갉아 먹고 사는 것이다.

많은 대학생들이 대학에 들어온 후에 극한 상실감에 빠진다고들 이야기한다. 고등학생 시절 대학입학만을 바라보며 열심히 공부하다가 막상 대학에 들어온 후에 그 목표를 상실해 버린 것이다. 이에 비할 바도 아닌, 목숨을 걸고 달에 다녀온 이들의 공허함은 어떠했을지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다.

하나 분명한 것은 하나의 꿈을 꾸었던 사람들이 계속 같은 꿈을 꾸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분명, 9명의 우주인들은 함께 달을 꿈꾸었지만, 그 꿈을 이룬 후에는 각자의 새로운 인생을 찾아갔다. 새로운 꿈을 찾은 것이다.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지만.)

사실, 이 책은 이런 점에서 나에게 더 큰 의미로 다가온다. 꿈을 이루는 그 과정보다는 그 꿈을 이룬 후의 모습에 대한 생각을 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아직 꿈을 이루지도 못했으면서 그 다음의 결과를 미리부터 걱정하느냐고 구박할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들이 하나의 꿈에 얽매이고 매달리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는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볼 문제인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쉽게 포기하라거나 여러 가지 꿈을 동시에 꾸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꿈을 이루고 못 이루는 것에 대한, 즉 결과에 대해 자유로울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실패했을 때뿐만 아니라 성공했을 때에도 똑같이 중요하다. 그 과정을 즐기는 것, 그리고 어떠한 결과가 주어지더라도 그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모습. 나는 <문더스트>를 통해 이것을 다시금 깨닫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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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 과정이 정답이다.

다름과 틀림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다름’과 ‘틀림’이 아주 다른 뜻이라는 것을 배웠다. 또 수능 언어영역의 문법 부분에서 여러 번 나와서 그 중요성이 확인되었지만, 여전히 이 사회에서는 ‘다른’이라는 단어를 ‘틀린’이라고 바꿔서 사용하는 사람들이 비일비재하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혼동을 하다 보니, 이 사회 자체도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받아들이는 모양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쉽게 용납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들을 ‘다르다’고 이야기 하지 않고 ‘틀리다’고 말한다.

대담은 아주 많이 ‘다른’ 두 사람이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 내용이다. 그 중 한 사람은 나와 약간 ‘다른’ 사람이고, 나머지 하나는 나와 아주 많이 ‘다른’ 사람이었다. 책을 읽으면서도 스스로 ‘그건 틀렸어‘라고 생각하는 내 자신을 돌아보면서 다르다는 것을 용납하고 이해하는 것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는 순간이었다.

누군가의 안경

누구나 자신만의 안경을 쓰고 살아간다. 그 안경들을 통해서 바라보면 신기하게도 모든 것들이 그 자신의 색깔을 잃어버린다. 오색찬란한 빛깔을 가진 것이라 하더라도 빨간 렌즈 안경으로 바라보면 빨간 색이 되어버리고 노란 렌즈 안경으로 바라보면 노란 색이 되어버린다. 아니, 사실 그것은 원래부터 어떠한 색깔도 가지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언제부터 이 안경을 쓰기 시작했을까? 우리들은 그 안경의 존재를 느끼고 있기는 한가? 사실 나조차도 그 존재를 인식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내 눈에 보이는 노란색을 빨간색이라고 하면 머리에 열이 뻗히기 시작한다. 노란색을 어떻게 빨간색이라고 하다니. 생각해보건대, 문제는 자신이 쓰고 있는 안경이다. 그런데 그 안경을 벗는 것이 쉽지가 않다. 그래서 생각해 본다. 차라리 눈을 감아버리자고.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

눈을 감으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어디에선가 소리가 들려온다. 바로 내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 결국 모든 학문은 인간을 향해 있다. 인문학과 생물학은 다른 방향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 시작은 인간이라는 출발점을 가지고 있다.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인문학을 연구하고 생물학을 연구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의 공유가 두 분야 간의 화합과 통섭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라고 묻는다면 답은 ‘아니요’ 다. 문제는 이 두 분야가 어느 종착점을 향해 달리느냐, 이다. 둘이 같은 출발점에서 시작했다는 것이 그 둘의 종착점이 같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정답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정답은 없다

도정일 선생님은 근본적인 문제일수록 정답은 없다고 이야기한다. 오히려 그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어서 그 이해의 폭이 넓어지는 것이리라. <대담>의 의미는 바로 그 지점에 있다. 두 상반되는 분야가 통섭을 이루었다. 라고 말하는 결과론적인 부분이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다, 라고 말하는 과정론적인 부분이 포인트다.

과학은 답을 추구하고 인문학은 질문을 추구합니다.

이 짧은 한 문장이 결코 가까워질 수 없는 두 학문의 운명을 나타낸다. 난 결과적으로 인문학이 생물학을 그리고 생물학이 인문학을 완벽하게 이해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그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 결과가 없는 노력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 과정에 대한 보상을 이야기 해주고 싶다. 서로를 알아가고 이해하기 위한 그 끊임없는 과정들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각자의 안경에 새로운 색깔을 넣을 수도 있고, 때로는 작은 것을 크게, 혹은 큰 것을 작게 볼 수 있는 시야의 확장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다른 대상을 용납하며 갖는 이해와 관용의 정신, 이것이 <대담>의 기본 정신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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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와의 대화>, 새로운 아마추어를 꿈꾸다.

그 끝없는 갈망

9년이라는 시간은 길다. 9년이라는 시간 동안 괴테와 에커만 그 둘을 연결해주었던 끈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한 사람의 일방적인 욕망이 아니라 두 사람 사이의 끊을 수 없는 서로에 대한 갈망이었을 것이다. 앎과 가르침에 대한 갈망 그 자체. 에커만은 괴테를 통해서 끊임없이 앎을 갈망했고 괴테는 에커만을 향해 끊임없이 가르침의 욕망을 분출했다. 그리하여 그 둘은 끊을 수 없는 관계를 이어나갔고 결국 신은 괴테의 죽음으로 그 둘을 갈라놓았다. 하지만 이 책 ‘괴테와의 대화’는 오늘날까지 남아 그 둘의 끊임없는 갈망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스승과 제자, 그 일방적인 관계에 대하여

괴테와 에커만의 관계에서도 엿볼 수 있지만 스승과 제자가 쌍방향으로 소통한다는 것이 일견 불가능해 보이기도 하다. 가르침과 배움의 관계에서 우리는 그 일방성을 경험하는 것이다. 더욱이 시대를 초월하는 거장과 이제 갓 문학계에 발을 들여놓은 신인의 관계는 어찌 보면 뻔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과연 에커만은 일방적으로 가르침을 당하기만 한 것일까? 분명히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만남이, 이 관계가 9년이라는 시간 동안 지속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글로 표현할 수 없는 극적인 교감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에커만의 소극적인 대응, 아니 더 나아가서 아무런 비판 없이 괴테를 수용했던 것에 대해서 비판하고 나서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괴테가 끊임 없이 에커만에게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은 그로부터 지속적인 반응과 피드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지속적인 반응, 그리고 교감을 통해서만 그 둘의 관계는 분명히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대화를 통해 배우다

어떠한 가르침의 형태를 가지지 않고서도 그로부터 무언가 배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 중에서 대화는 아주 특별한 부분을 차지한다. 가르침이라는 것이 일정한 수직적 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대화는 수평적 관계를 그 기초로 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대화를 통해서 우리는 많은 것들을 깨닫고 얻게 될 때가 많다. 괴테와의 ‘대화’도 마찬가지이다. 사실 괴테가 에커만에게 어떠한 특별한 가르침을 주기 위해 그와 시간을 보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냥 괴테는 에커만과 대화를 나누고 싶었을 뿐이고 그 대화를 통해서 에커만은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일반적인 가르침은 오래 기억에 남지 않지만 대화를 통한 깨달음은 더 오래 기억 속에 남게 된다. 그 상황의 분위기와 이미지가 주는 강렬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괴테와의 대화는 새로운 가르침의 방식에 대한 생각의 여지를 남겨준다.

경외와 질투 사이

이 책을 읽다보면 에커만의 심리적인 상태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무언가 항상 객관적, 혹은 괴테에 대해 우호적인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그는 괴테와 대화를 나눌 때, 그 대화를 정리할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경외와 질투 사이의 어느 지점이 아니었을까? 거장들을 접하게 될 때면 나도 이러한 두 미묘한 감정 사이의 어느 지점에서 항상 허덕였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의 감정은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긍정적인 자극을 주거나 좌절하게 만드는 부정적인 자극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에커만은 괴테와 대화를 나누면서 희망을 품었을까, 아니면 절망에서 헤매었을까? 아무도 모르는 일이겠지만, 아마도 시간이 지날수록 절망에 더 가까워지지 않았을까? 혹시 모르겠다. 에커만이 괴테의 죽음으로 삶의 희망을 다시 찾았을지도.

새로운 아마추어를 꿈꾸며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대단하다고 느꼈던 것은 괴테의 앎의 폭과 깊이, 그리고 거기에 더해지는 자신감이었다. 그리고 내 가슴을 후비는 그의 명언 한 구절.

이것이 바로 아마추어의 본질이네. 어떤 일에 내재하는 어려움을 알지도 못하고 그럴 능력도 없으면서 항상 뭔가를 해보겠다고 나서는 태도가 말일세. (p.253)

괴테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거장이다. 거룩한 거장. 그리고 나는 아마추어의 본질을 제대로 내재하고 있는 전형적인 아마추어다. 순결한 아마추어. 거장이 되고 싶은지 누군가 물어본다면 내 대답은 어떨까? 누구나 새로운 거장이 되기를 꿈꾸는 시대이다. 그래서 남들과의 경쟁에서 치열하게 싸우기도 하고 뼈와 살을 깎는 고통을 인내하며 버텨낸다. 그래서 우리들 중 아주 극소수는 거장이 된다. 무언가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을 취득하게 되는 거다. 괴테는 거장이 되고 싶었을까? 내 생각에는 그야말로 진정한 아마추어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는 글을 쓴다는 것에 내재한 어려움을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그 글쓰기의 바다로 빠져든 최악의 아마추어였으니깐. 그래서 나도 한 번 꿈 꿔본다. 내가 있는 이 자리에서 새로운 아마추어가 되어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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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 지독한 과잉이 낳은 지나친 몰입

모두에게 사랑받는 영화는 없다. 아니, 있을 수 없다. 영화도 하나의 ‘제품’이나 ‘서비스’로 본다면 감독이나 제작자가 영화의 투자 시점이나 제작 시점에 예상되는 관객군들을 예상하고 그들의 ‘니즈’를 파악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래서 어떤 영화는 여성 관객들이 몰리기도 하고, 또 어떤 영화는 가족 관객들에게 어필하기도 한다. 여러 관객군들을 교묘하게 잘 공략해 낸 영화는 소위 ‘대박’을 치기도 한다. 그런데 간혹 가다 사람들의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영화들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극찬을 하는 반면에, 다른 사람들을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이런 영화들은 대부분 ‘지나침’이라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어느 관객이 이 ‘지나침’을 우여곡절 끝에 받아들이는 순간, 그 영화는 그 관객에게 명작이 되지만, 그렇지 못한 관객에게는 심적, 정신적 고통을 안겨주게 되는 것이다.

나홍진 감독의 <황해>를 보았다. 500만 흥행의 <추격자>에 이은 차기작, 하정우와 김윤석이 또다시 함께 한다는 것만으로도 강력한 무엇인가를 기다리던 관객들이 기대를 품기에 충분한 조건으로 보였다. 그런데 별다른 사전조사 없이 영화관에 도착해 러닝타임이 160분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지나침’의 냄새를 맡았다. 그래, 한 번 그 ‘지나침’을 받아내리라 생각하고 좌석에 몸을 파뭍었다. 영화는 참으로 지독했다. 찌르고, 자르고, 찍고, 부수고, 밟고, 씹는 장면의 연속. 인간 내면의 악이 걸치고 있는, 하나 남은 거적데기 마저 무참하게 들추어낸 듯한 지독한 과잉이었다. 등장인물 그 누구에게도 감정이 이입되지 않고 완전한 방관자로서 그 장면들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너무도 힘겨운 시간들이었다.

놀라운 일이 벌어진 순간은 구남(하정우)이 버스 검문에서 달아나 산으로 탈주하는 장면이었다. 팔에 총을 맞아 자신의 양말로 상처 부위를 동여매며  흐느끼는 그 장면에서 구남에게 원치 않는 감정적 지지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장면 이후 면가(김윤석)와 태원(조성하)을 두 축으로 하는 절대악의 향한 구남의 철저한 몸부림에 마음 속으로 ‘파이팅!’을 외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또 다시 시작된 피와 살육의 향연. 결국 두 악의 축은 무너지고 또 다른 악의 뿌리가 발견되는 것으로 영화는 마무리 된다.

약간은 허무한 듯, 약간은 환상인 듯한 마지막 장면에서 감독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 자신의 지독한 과잉이 엄연한 현실이라는 것을 마지막까지도 그렇게나 강하게 주장하고 싶었던 것일까? 인정하기 싫지만, 이번에는 내가 감독의 지독한 과잉에 지나친 몰입으로 화답한 것 같다. 그래서 내심 흥분되면서도 약간은 씁쓸하다. 지독한 과잉을 현실로 받아들인 내 모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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