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기와의 인터뷰

모기에 관한 루머는 끊이질 않았다. 누군가는 명확한 근거 없이 모기가 자신의 피를 선호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으며, 모기에 물린 곳에 손톱을 이용해 십자 모양으로 자국을 만들면 그 날은 더 이상 모기에 물리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었다. 가장 설득력 있었던 루머들 중 하나는, 모기들이 방 안에 불이 환할 때는 숨어 있다가도 우리가 불을 끄고 잠자리에 누울 때마다 노래를 부르며 등장해, 우리의 귀 주위를 맴도는 것은 갓 잠이 든 인간의 귀 근처에서 빨아들인 피가 가장 맛이 있기 때문이라는 소문이었다. 하지만 이 중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은 하나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모기는 우리와 함께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모기들을 하찮은 존재로 생각하고 있지만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우리는 모기들과 피를 나눈 혈맹의 관계라 할 수 있다. 그런 모기들에 대해서 우리는 너무나 무관심했으며, 때로는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모기향, 모기약 등으로 그들을 무참히 처리하거나, 방충망으로 소통 자체를 차단하기도 했다. 이대로라면 인간과 모기 사이의 감정의 골이 깊어지면서 결국 양 종족 간의 전쟁으로 치닫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판단 하에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국제 흡혈 모기 협회 한국 지부 소속의 간부급 모기에게 접촉해 인터뷰를 성사시켰다.

류성한(이하 류): 바로 본격적인 인터뷰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괜찮으시죠?

모기(이하 모): 네, 원하던 바입니다. 요새 날씨가 갑자기 추워지는 바람에 체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입니다. 가능한 한 빨리 끝내도록 하지요.

류: 네, 알겠습니다. 요새 한국에서는 가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는 모기들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나요?

모: 사실 저희도 억울한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많은 인간들이 모기들은 여름에만 활동 하는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여름 이외의 계절에 등장하게 되면 오히려 더 많은 욕을 먹게 되는 상황인데요, 사실 저희들도 나름 가이드라인을 가지고 있고 그 가이드라인에 맞춰서 활동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류: 그 가이드라인은 어떤 것이죠?

모: 일종의 활동 지침이라고 할 수 있겠죠. 전 세계의 모기들은 이 활동 지침에 따라야 합니다. 크게 두 가지의 지침이 있습니다. 첫째로는 활동이 가능한 온도의 범위에 관한 것으로 모든 모기들은 인간의 기준으로 대략 14도와 41도 사이에서만 활동을 해야 합니다. 간혹 가다 그 범위 밖에서도 활동을 하는 모기들이 있는데 대부분 제 풀에 꺾여 목숨을 잃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두번째 지침으로는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혈액을 섭취할 수 있는 자격 조건에 관한 것입니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모든 모기들이 인간의 혈액을 섭취한다고 생각하지만 모기 사회에서 흡혈이 가능한 부류는 한정되어 있습니다. 산란기에 있는 암컷 모기만이 흡혈이 가능합니다. 그 외의 모기들은 다른 곤충들과 마찬가지로 식물의 즙액이나 과즙을 섭취합니다.

류: 흥미로운 이야기군요. 산란기에 있는 암컷 모기만 흡혈이 가능한 이유가 있나요?

모: 좋은 질문입니다. 우선 인간을 포함한 동물들의 피를 빨아 먹는다는 것은 모기 입장에서도 그렇게 유쾌한 일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우리들이 목숨을 걸고 흡혈을 하는 이유는 오로지 단 하나의 이유, 바로 우리의 후손들을 위해서입니다. 평소에 먹는 식물의 즙액이나 과즙으로는 우리의 새끼들이 건강하게 성장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결국 더 많은 에너지를 얻기 위해서는 다른 동물들의 혈액을 이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류: 모기의 모성애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군요. 약간 주제를 바꿔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흡혈 대상을 선정하시나요?

모: 인간들 사이에서도 여러 가지 루머들이 있고 실제로 어떤 TV 프로그램에서는 실험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개개의 모기들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가장 큰 요인은 아무래도 냄새입니다. 땀냄새든지 향수 냄새든지 상관없이 본능적으로 자극적인 냄새를 따라가게 됩니다. 사실 모기들에게 이성이라는 부분이 크게 존재하지는 않지만, 자극적인 냄새를 맡게 되면 그 조금 있는 이성도 금방 상실하게 됩니다.

류: 선호하는 흡혈 대상이 있다면?

모: 아무래도 질긴 피부와 걸쭉한 혈액을 가진 노인들보다는 부드러운 피부와 맑은 피를 가진 어린이들을 선호합니다. 모기들 사이에서도 이왕 목숨 걸고 흡혈하는 거, 더 좋은 피를 빨자는 분위기가 대세입니다. 게다가 노인들의 질긴 피부에 대롱이 박혀서 목숨을 잃은 모기들의 이야기들도 심심찮게 들려오고 있는지라 이 분위기는 당분간 지속될 것 같습니다.

류: 모기에 대처하는 인간들의 새로운 무기들이 개발되고 있습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한 특별한 전략이 있습니까?

모: 사실 우리가 인간들 입장에서 위생해충인 것은 사실입니다. 동기나 의도야 어찌되었든 간에 우리들이 치명적인 병을 옮기기도 하니깐요. 하지만 바로 옆에서 동족의 처절한 죽음을 바라보는 것이 가슴 아픈 일임은 분명합니다. 따라서 모기 사회 내에서도 인간들의 집요한 공격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말씀 드릴 수 있으면 좋겠지만 대부분이 특급기밀사항이고 또 특히나 인간이시기 때문에 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류: 아닙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이번 질문은 약간 불편한 질문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모기들이 왜 이렇게 많은 건가요?

모: 저희들 입장에서도 큰 고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수십 년 전만 해도 약간의 분쟁이야 존재했지만 그런대로 좋은 관계를 유지해 온 우리 모기들과 인간들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인간들이 무절제하게 공장들을 건설하면서 우리들의 원수들인 미꾸라지와 송사리들이 급속도로 그 모습을 감추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기들은 이제 우리 세상이 찾아왔다면서 쾌재를 불렀죠. 하지만 그 행운이 이런 재앙을 불러올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모기 사회는 급속도로 팽창해 갔고, 그 결과 모기 사회 내부에서 한정된 흡혈권을 쟁취하기 위한 분쟁이 발생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 사회와의 본격적인 반목이 시작되었죠. 결국 세계 곳곳에서 많은 모기들이 다양하고도 잔인한 살상 위협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류: 그렇다면 인간과 모기 사회가 화해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노력들이 필요할까요?

모: 모든 해결의 열쇠는 인간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생태계라는 시스템의 가장 상위에 존재하면서 동시에 그 외부에서 감독자의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인간입니다. 따라서 생태계가 원래의 모습대로 회복되는 데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도 바로 인간입니다. 우리 주위의 동족들이 송사리나 미꾸라지에게 혹은 인간에게 목숨을 잃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지만 대부분의 모기들은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들의 희생이 있기 때문에 나머지 모기들이 안전하게 흡혈을 하고 또 후손들을 생산해낼 수 있기 때문이죠. 또 우리 모기 사회가 지나치게 커지는 것 또한 바라지 않습니다. 그것의 부작용을 이미 뼈저리게 느끼고 있기 때문이죠. 생태계 속에서 자연스러운 크기와 역할을 감당하는 모기 사회, 그리고 이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인간들의 의지와 노력. 이것이 바로 문제 해결을 위한 초석이라고 생각합니다.

류: 마지막으로 인간들에게 한 말씀

모: 돌아다니다보면 모기에게 안 물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인간들이 보입니다. 우리들 심리도 이상한 것이 꼭 그런 사람들 피를 꼭 빨아먹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반대로 완전한 오픈 마인드로 우리들을 맞이하는 사람들에게는 호의를 베풀어주고 싶은 마음이 들고요. 우리 모기들을 대할 때, 너무 벌레처럼 대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같은 자연에서 함께 지내는 친구처럼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너무 무리한 부탁인가요?

류: 한 번 생각해 볼 문제인 것 같군요. 좋은 말씀들 감사드립니다.

모: 별 말씀을요.

모기는 엥~ 소리를 내며 인터뷰 장소를 떠났다. 그 날 밤, 나는 오픈 마인드를 실천해 볼 요량으로 모기향을 피우지 않고 창문을 연 채로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나는 오른발에 3방, 왼팔에 4방, 오른손에 2방을 물린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도 이 인터뷰를 정리하면서 온 몸을 벅벅 긁어대고 있다. 인간과 모기와의 화해는 아직도 먼 미래의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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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 이게 뭥미?

처음으로 접하는 e-Book. 그리고 다시는 접하기 싫은 난해한 문장들. 짧은 혀로는 발음하기도 힘든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 여러모로 좋지 않은 만남이었다.

그 스스로를 ‘그’라고 표현하며 도저히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소재들과 어휘들을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순서로 나열하는 이상한 책. 안 읽고 말어, 라며 항복을 선언한 나에게 ‘그’가 제안한 것은 책장을 넘기다가 꽂히는 부분만을 골라서 읽으라는 것이었다.

왼손잡이

누군가가 왼손잡이라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당신은 식탁에서 나이프나 포크의 지시된 위치와는 반대로 먹는다. 오른손잡이가 앞서 전화를 사용한 후, 전화 수화기는 당신에게 반대로 놓여져 있다. 가위는 당신의 엄지손가락을 위하여 만들어져 있지 않다. 옛날 교실에는 다른 사람들과 같아지도록 무척 고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나는 적응했고 그런 식으로 계속해나갔다.

어떤 지극히도 객관적인 텍스트에서 어떠한 감정의 증대나 이입을 경험하는 경우가 있다. 위의 롤랑 바르트의 짧은 글은 왼손잡이로서의 ‘그’의 삶을 단편으로 잘라서 객관적인 시각으로 보여주고 있지만 내가 느끼는 감정은 동정, 분노, 안타까움과 같은 것들이다. 분명히 ‘그’는 텍스트에 자신의 감정을 실지 않은 것이 분명한데 나는 감정의 변화를 경험한 것이다.

가끔씩 글을 읽을 때 느끼는 소름 돋음이 있다. 나는 절대로 그 감정을 이해할 수 없는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스스로 그 감정을 느끼고 있는 그런 때가 있다. 그런 경우는 대부분 감정을 질질 흘리는 그런 글이 아니라 지극히 객관적이고 관조적인 시선으로 무엇인가를 관찰하는 글이었다. 도대체 어디에 그 감정들을 숨겨 놓았을까?

위선?

어떤 ‘텍스트’에 대하여 말할 때, 그는 독자에게 아첨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저자를 높이 산다. 그러나 그가 이러한 찬사를 발견한 동기는 아무것도 아니다. 독자에게 아첨하기 위해서 그 자신은 아무 짓이나 하며, 요컨대 그가 ‘효과’의 기술을 결코 단념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부터

‘효과’의 기술이 도대체 무엇일까, 라는 의문이 고개를 쳐든다. 아마도 독자들에게 하는 아첨의 기술로 이해가 되는데, 여러 가지 생각 중에서 가장 설득력이 있는 것은 독자들이 원하는 내용을 쓴다는 것이 아닐까? 드라마 작가들도 시청자 게시판의 분위기를 보고 다음 내용을 정한다고 하던데 이러한 ‘효과’의 기술을 알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시청자들의 의견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을 죽이는 지조 있는 작가들은 롤랑 바르트에게 인정 받을 수 있는 자질을 갖추게 되는 셈이다. 사실 나도 이런 작가들에게는 찬사를 보내는 바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좋아하지 않는 것

내가 좋아하는 것과 좋아하지 않는 것을 나열하는 소녀적 취향. 그 내용을 면밀히 살펴보게 되면 더 음흉한 미소를 짓게 된다. 아마도 싸이월드의 100문 100답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나 보다, 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며.

체계/체계성

현실계의 고유성은 ‘통제할 수 없다‘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체계의 고유성이란 현실계를 통제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통제를 거부하는 자는 현실계에 직면하여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장치로서의 체계를 보내버리고 글쓰기로서의 체계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처음 읽을 때는 잘 이해되었다가 계속 반복해서 읽다 보면 더욱더 이해가 안 되는 위의 글과 같은 종류의 글들을 접하게 되면 오기가 생겨서 계속해서 읽게 된다.

통제를 거부하는 자는 글쓰기로서의 체계성만을 받아들이라는 이야기. 하지만 ‘그’ 자신은 그 체계성마저 버리고 말았다.

몇 안 되는 짧은 글들을 읽으면서 사고의 흐름과 글쓰기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각 개인의 사고의 흐름이 다 천차만별임에 분명한데 왜 글쓰기의 형식은 크게 다르지 않을까. 에 대한 생각이었다.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그것이 바로 글쓰기의 체계성이고 롤랑 바르트는 그 체계성을 무시함으로써 자신의 사고의 흐름을 글로 풀어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의 흐름에 따른 글쓰기가 다른 사람들에게 쉽게 이해되지 않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바람처럼 이 책을 읽은 것 만으로라도 만족하는 자세를 가져야겠다고 스스로를 위로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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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한스와 도라>, 프로이트 받아들이기.

정신분석의 요체는 무엇을 증명하는 데 있지 않고 무언가를 변화시키는 데에 있다.

- 지그문트 프로이트

프로이트에 대한 오해 혹은 편견이 있었음을 고백한다. 더불어, 사실 이 책을 읽는 가운데에도 그 전부를 떨쳐내지 못했음을 함께 고백하는 바이다. 다만 다행인 것은 책을 가만히 내려놓고 그의 삶과 이론들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할 때에 적지 않은 이해와 공감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꼬마 한스의 정신분석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의미가 무엇인가, 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질문에 답을 하는 것은 어려운 일임에 분명하다. 이 답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단계별로 1) 이 정신분석의 이론적 배경, 2) 정신분석의 방식, 그리고 3) 정신 분석의 결과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다만, 이와 같이 단계별로 접근을 하는 경우, 글의 논리야 탄탄해지겠지만 짐짓 지루하게 흐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그 방법을 택하는 대신 중요한 키워드를 중심으로 서평을 이끌어 나가는 방법을 택하도록 한다.

대화, 모든 문제 해결의 실마리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 중의 하나는 꼬마 한스의 신경증, 즉 공포증을 분석하고 치유하기 위해 사용된 방법이 바로 대화였다는 사실이었다. 특히 더 눈에 띄는 것은 (프로이트가 머리말에서 극찬한 것처럼) 자신의 아들이 마음을 열고 자신의 감정과 생각에 대해서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도록 한 한스 아버지의 노력이었다. 책 속에서 계속 반복되는 부자(父子) 사이의 대화를 볼 때에 느낄 수 있는, 약간은 소름 끼치는 어이없음을 생각해 본다면 그 아버지의 노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아들에게 무엇인가 문제가 있다고 확신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화, 즉 정신분석으로만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아버지의 모습은 일부분 이해하기 힘들기도 하지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지금까지의 경험에 비추어 공포증은 폭력적인 방법으로 치료할 수 없으며 그것은 상황에 따라서는 위험하기까지 하다. 여기서의 폭력적인 방법이란 환자가 자신의 보호막으로 사용하고 있던 것을 벗겨 버린 다름 그를 불안의 상황 속으로 몰아넣는 일이다.

프로이트가 정밀 판별 부분의 말미에 정신분석의 결과가 꼬마 한스와 그의 아버지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판단한 것과 추기(追記)에서 밝히듯, 19세의 한스가 건장한 청년으로 성장했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그 꼬마 한스가 훗날 유명한 오페라 감독(헤르베르트 그라프)이 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했을 때에, 이 대화를 통한 정신분석의 방법이 적어도 꼬마 한스에게 부정적으로 작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하게 만든다.  또한 위에서 프로이트가 언급한 것은 비단 정신분석에서 뿐만 아니라 일상을 살아가며 여러 사람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에도 적용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얼마나 폭력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보호막을 무참하게 벗겨버리는가? 정신분석이라는 것이 그 실체가 눈에 쉽게 드러나지 않는 한 사람의 ‘무의식’을 이해하고 분석하고 발견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할 때에,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다른 사람의 ‘자아’ 조차도 무시하는 나의 모습을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이에 더해서 우리는 대화를 통한 재발견 혹은 회복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어떠한 강박관념이나 해결의지를 소유하지 않고서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 스스로의 문제점과 그 해결방법을 동시에 발견하거나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봤을 때, 프로이트가 정신분석의 도구로 대화 혹은 인터뷰를 사용했다는 것은 그가 이런 대화의 힘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프로이트는 대화를 통해 누군가의 무의식을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이끌어낼 수 있으며, 이것이 정신분석에 매우 유용하다고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의 생각은 옳았다.

본능, 통제해야 하는가?

이들은 정신분석을 잘못 이해한 나머지 인간의 나쁜 본능을 자꾸 의식시키면 나쁜 본능이 더욱 강화될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똑똑한 사람들은 신경증 배후에 존재하는 나쁜 것들을 제발 들추어 내지 말라고 충고할 때만 행동에 일관성을 보인다. 그렇게 말하면서 그들은 자신들이 의사라는 사실을 망각한다.

인간의 본능, 특히 성욕의 발현은 (어린 아이들에게도)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라고 프로이트는 주장한다. 꼬마 한스의 이야기에서도 이는 그대로 드러난다. 실제로 자신의 주장이 한스의 사례를 통해서 증명되어가는 과정에 만족감을 드러내는 그의 모습을 책 곳곳에서 발견하게 된다. 또한 그는 이러한 성욕의 발현에 있어서 그것을 감추기에만 급급한 의사들에게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는데, 프로이트는 오히려 그러한 본능을 의식시키는 것이 신경증의 치유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꼬마 한스에게도 자신의 성욕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표현하도록 유도하는 것을 보게 된다.

프로이트 이론의 세 가지 키워드로 무의식, 꿈, 성(Sex)을 꼽을 수 있는데 이 중 성은 나머지 둘의 근간을 이루는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결국 모든 것은 성적인 욕망과 맞닿아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사실 이 부분이 나를 포함한 프로이트를 얕게 아는 사람들이 그를 오해하는 부분인데, 엄밀하게 따져보면 그것은 프로이트 그 자신이나 그의 이론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기보다는 사람들에게 이미 성적인 욕망 자체를 통제하고 금기시하는 사회의 분위기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들은 성적인 욕망에 대한 그 관점을 진리인 냥 받아들인 것이다. 꼬마 한스와 그의 아버지의 대화에서 거부감을 느끼게 되는 것도 다 이러한 부분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교육은 오로지 본능을 통제하는 것을, 좀 더 적절하게 표현한다면, 본능을 억누르는 것을 자체의 과제로 삼아왔다. 그러나 그 성과는 늘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리고 성공이 이루어지는 경우도 그런 교육을 위해 선호되는 소수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했을 때였다. 사실 이들은 본능을 억누르도록 요구될 필요도 없는 사람들이다.

꼬마 한스의 사례를 봤을 때에, 그가 자의든 타의든 상관없이 그의 성적인 욕망을 그의 언어로 ‘표현’ 한 것은 그의 공포증 치유에 큰 긍정적 영향을 준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본능을 통제하지 않는 것이 옳은 것인가, 라는 질문에 긍정적으로 답하는 일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본능의 ‘표현’과 ‘실행’에는 매우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꼬마 한스의 경우에도 본능의 ‘표현’ 단계에만 머물렀기 때문에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던 것이다. (실제로 ‘실행’의 단계로 넘어갔다고 하면 각종 신문과 뉴스의 1면을 장식할 사건들이다.) 프로이트는 이것이 본능이 다른 무엇인가(어머니와 아버지를 향한 애정)에 의해 억압받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문득, 내가 인간으로서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지,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만큼 반인륜적이거나 잔인하고 끔찍한 상상을 하게 되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될 때가 있다. 프로이트에 따르자면 이는 과거에 경험한 사건이나 행동들이 내 무의식 가운데 일정한 형태의 욕망 혹은 본능으로 저장되어 있다가 과거의 사건을 떠올리게 만드는 무엇인가를 경험했을 때 복합적이거나 변형된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이러한 무의식 속의 삐뚤어진 욕망은 조직되고 현실적인 부분인 ‘자아’와, 비판적이고 도덕적인 기능을 하는 ‘초자아’에 의해 조절되는데, 이 때 무조건적인 억압이나 통제가 진행될 경우 욕망이 뒤틀리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에서 살펴보았을 때, 본능을 억누르는 것을 교육하기 보다는 스스로 자신의 본능과 무의식 속 자아를 발견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이 필요하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결국, 꼬마 한스의 ‘증상’의 뿌리가 되는 것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이다. 아버지를 자신의 라이벌로 간주하고 어머니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아버지와 경쟁을 한다는, 어떻게 보면 발칙한 이 이야기가 거의 모든 남자 아이들에게 해당된다고 프로이트는 주장한다. 엄마와 함께 잠자리를 하고 싶어한다거나 아버지가 이 세상에서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등의 직접적인 표현 이외에도 여러 사건들과 사물들을 엄마와 아버지와 연관시켜서 생각하는 간접적인 표현 등을 통해서 꼬마 한스의 모든 욕망이 한 곳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정도의 편차가 심할 것이라는 전제 하에, 이러한 프로이트의 주장은 일견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멀리서 예를 찾지 않더라도 지금까지 이어온 나의 작은 습관 중의 하나를 통해서도 설명이 가능해 보인다. 19살의 꼬마 한스가 어린 시절을 완벽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나도 내 유년시절을 정확하게 기억할 수는 없지만 언제부터인가 안방의 부모님 침대에서 잠을 자는 것을 좋아하는 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낮잠을 잘 때나, 혹은 부모님이 집을 비우셨을 때 나는 내 방의 침대 대신 부모님의 침대를 사용하는 것이다. 물론, 침대가 넓고 푹신하다는 표면적인 이유가 있지만, 프로이트에게 정신분석을 받는다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새로운 사례로 보고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선천적으로 발생하는 것인지, 아니면 어떠한 자극에 의해서 학습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을 수 있겠지만 꼬마 한스의 사례나 개인적인 견해를 고려한다면 학습되는 경향이 더 크다라고 이야기 할 수 있겠다. 엄마에 대한 애정을 갖게 되는 것은 원래 한 몸이었다는 상징적이면서도 실질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아이로서 엄마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 더 많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반대로 어린 시절에 엄마보다는 아버지와 많은 시간을 보낸다고 가정을 한다면 반대의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공포(상처)를 끄집어내야 하는 이유

우리가 신경증에 걸린 성인을 상대로 정신분석을 해보면, 거의 대부분 그의 신경증은 이른바 어린 시절의 공포증과 연결되어 있으며 그것의 연속임을 알게 된다. 그 결과 심리적 활동의 실타래는 어린 시절의 갈등에서 출발하여 끊이지 않고 줄기차게 그의 생 전체를 통해 이어지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꼬마 한스의 공포증 치유의 가장 큰 이득으로 ‘그의 가슴 속에서 그의 삶에서 억압된 콤플렉스 형태로 언젠가 중요성을 지니게 될 씨앗을, 그리고 신경증의 소질이 아니라면 분명히 어느 정도 성격의 왜곡을 가져올 씨앗을 더 이상 품지 않게 된 것‘임을 이야기했다.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믿음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 근원이 해결되지 않은 문제는 계속해서 그 사람을 따라다니며 그를 괴롭히게 되는 것이다. 겉으로는 무던해질지 몰라도 치명적인 순간에 다시 상처가 드러나게 마련이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부분을 ‘무의식’이라는 개념을 통해 완벽하게 설명하는데 공포증의 충격이 어떤 사람의 ‘무의식’에 존재함으로써 계속해서 그의 삶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것의 폐단을 알았기 때문에 프로이트는 꼬마 한스의 무의식 속에 내재한 억압된 욕망을 발견하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우리의 주위를 둘러보면 자신의 공포, 혹은 상처에 대해서 드러내거나 이야기하는 것을 꺼려하는 사람들이 있다. (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다.)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숨기고 막는 것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억압된 욕망, 그리고 공포를 드러내고 도려내는 작업의 무게가 너무나도 중하기 때문에 회피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단호하게 말한다. 그러한 발전의 과정-공포증을 극복하는 과정-이 한 인간의 삶에 끼치는 긍정적인 영향력은 엄청나다는 것을.

어린 시절에 나는 고통 받는 인간을 도우려는 어떤 강한 열망도 가졌던 기억이 없다. (중략) 그러나 젊은이가 되어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수수께끼들 가운데 몇 가지를 이해하고 가능하다면 그 해결책에 뭔가 기여까지도 하고 싶은 억누를 수 없는 욕망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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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와 여자>, 뻔하지만 담백한.

‘남자와 여자‘라는 뻔한 제목을 내세우고 있는 이 책을 처음 집어 들었을 때,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 기대감은 그리 크지 않았다. 20년 전에 공석에서 높은 사회적인 지위를 가지고서 만났다던 두 대담가들의 정확한 나이야 알 수는 없지만, 살아볼 만큼 살아본 능구렁이들임이 분명하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그래도, 오래 살아온 연륜이 느껴지는 생각의 조각들이 몇몇 눈에 띄어 그 조각들을 중심으로 글을 이어나가보자 한다.

질투, 그 알 수 없는 감정의 변주곡

지루: 질투하는 사람은 질투심과 모욕감 때문에 이중으로 고통을 받지요

레비: 질투를 억제한다는 것은 너무 어렵습니다. 질투는 사랑의 일부라고 할 정도에요. 질투는 사랑과 동질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는 질투를 잘 하지 않는 타입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 때문에 많은 곤욕을 치렀다. 질투를 거의 하지 않는 나의 태도에 여자 친구가 나의 진심을 의심하고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아마도 질투를 사랑과 동질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너를 너무 믿어서 그런 것이다.’ 라는 요지의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어가며 한참 동안 달래주었던 기억이 있다. 그 후에 일부러라도 질투하는 ‘척’을 보여주면 기분 좋아하는 여자 친구의 모습을 보며 질투가 또 다른 차원의 애정 표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 셈이다.

질투가 원래 적다는 나같은 사람을 제외하고서라도 질투를 한다는 것이 사랑한다는 것의 반증이 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아니고서는 그 질투라는 감정을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어려울 테니깐. 그런데 무서운 것은 질투하는 사람의 감정 상태다. 저자의 말 그대로 질투심과 모욕감 때문에 이중으로 고통을 받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대상이 되는 사람은 그것을 통해 사랑 받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니, 왠지 감정이 너무 한 쪽으로만 유익한 것이 아닌가 하는 쓸데 없는 걱정에 이르게 된다.

서로에게 투명해지기

레비: 사랑하는 관계에 있어서는 결코 투명할 수가 없어요

지루: 사랑이란, 상대방에게 접근하는 방법이지만, 사실 그것은 당신에게나 그에게나 영원히 알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지루: 서로 이해한다는 것은 가능한 한 서로를 제거하는 것, 즉 서로에게 투명해지는 것입니다.

레비: 천만에! 천만에 말씀입니다! 그것은 반대로 모든 것을 땅바닥에 내던지는 가장 확실한 수단일 겁니다. 오해의 소지를 완전히 제거했다는 부부는 문자 그대로, 더 이상 서로 할 말이 없는 부부입니다.

부부 사이에, 혹은 연인 사이에 모든 것을 투명하게 해야하는 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참 분분하다. 가릴 건 가려야지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입장이 있는 반면에 모든 것을 다 공개해야 오히려 사이가 더 돈독해진다는 주장도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후자의 입장을 지지하는 편이다. 물론 공개하고 투명해지는 것만 한다면 관계는 악화될 수밖에 없다. 서로에게 투명해지는 것은 필수적으로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다. 서로에 대해서 알아간다는 것은 그만큼 서로에 대한 책임감도 함께 늘어간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완전 투명해지는 것이 가능한가, 묻느냐면 대답이 ‘아니오‘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사람의 마음 속은 모른다는 멋진 우리나라 속담도 있거니와, 한 사람을 완전하게 알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오만한 생각인지 모른다. 따라서, ’오해의 소지를 완전히 제거했다는 부부는 문자 그대로 더 이상 서로 할 말이 없는 부부입니다.’라고 말하는 레비의 주장은 전혀 성립이 안 되는 주장이라 할 수 있겠다. 한 평생을 서로에게 투명해지기 위해 노력한다 할지라도 죽을 때까지 상대방의 반이라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지에 대해서는 나도 의문이다.

유혹의 기술

레비: 기본 메시지가 두 가지 있지요, 첫째, 그는 모든 여자를 다 경험해 보았다는 것. 둘째, 내가 마지막 여자라는 것.

레비: 세상 사람들은 불공평하게도 여자들을 사랑하는 남자들과 사랑하는 척하는 남자들로 나뉘어져 있다고. 그 상대가 되는 여자들은 그것을 알겠지요, 그렇지 않나요?

재미있게 읽었던 부분 중의 하나이다. 남자들은 여자들의 어떤 부분에, 여자들은 남자들의 어떤 부분에 유혹을 느끼는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내가 이상하게 여겼던 점들 중의 하나는 희대의 카사노바들은 그들이 경험했던 모든 여자들과 평생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는 점이다. 여러 이야기들이 떠돌지만 대부분은 그들이 모든 여자들을 인격적으로 대우했다느니, 언제나 진실했다느니 하는 종류들이다. 그래도 여기에는 톡 까놓고 매력적인 외모에 대해서 이야기한 부분이 통쾌하기도 하고 시원하기도 하다.

그래도 읽고 보니 무언가 솔직한 맛이 있어 담백한 책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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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낮은 중국>, 날 것의 비릿한 아름다움

‘날 것’의 아름다움

사람들은 무엇인가 정돈되고 규격화된 것에 매력을 느끼고 또 아름다움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이와 반대로. 정돈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대해서는 부끄럽게 생각하고 아름답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여자들이 자신의 쌩얼을 공개하는 것을 꺼려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남자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의 쌩얼에 반하기도 한다. 아무 것도 더해지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 바로 ‘날 것’의 아름다움이다.

<저 낮은 중국>에서는 다른 책에서는 볼 수 없는 ‘날 것’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다. 상식적이지 않은 사람들의 거침없는 행동과 말투, 그리고 그것을 최대한 살리기 위한 인터뷰어의 노력들. 기존의 책들이 대리만족을 통해서 우리에게 카타르시스를 주었다면, 이 책은 그 자체만으로 우리들의 ‘날 것’에 대한 원초적인 본능을 건드린다.

그러나, 동시에 거부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너무나 날 것이기에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도 버겁다. 육회처럼 약간의 양념과 무가 함께 곁들여져 있다면 더 맛있게 먹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아무런 양념이 되어있지 않은 생고기를 우걱우걱 씹어 먹는 듯한 기분. 이것은 묘한 쾌락을 주는 동시에 버릴 수 없는 찝찝함을 주기도 하는 것이다.

신념으로서의 개똥철학

가장 큰 찝찝함을 주었던 부분은 바로 그네들의 개똥철학이었다. 신념이라고 말하기에는 약간 불편한. 생각 없이 사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사실은 자신만의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살아간다. 다만, 그것을 말로 표현할 수 있는가, 아니면 삶을 통해서만 드러날 수 있는가의 문제일 뿐이다.

이들은 자신의 개똥철학을 말로 표현하기도 하며, 자신들의 삶을 통해 직접 드러내기도 한다. 그들의 개똥철학은 인신매매도 오입질도 마약을 하는 것도 몸을 파는 것도 모두 정당화 시켜준다. 세상의 기준에서, 남의 시선에서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 스스로 그 삶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정에 따르는 모든 행위로 그들의 삶이 이루어진다.

그런데 과연 그들이 그런 삶을 선택했다고 해서 그들이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우리에게 있는 것인가, 에 대한 질문은 우리 스스로의 삶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만든다. 사실,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의 개똥철학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고 우연히도(아니면, 너무나 당연하게도) 우리의 개똥철학은 주류 사회에 편승했을 뿐이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그들의 개똥철학은 주류 사회에 편입될 만큼 정상적인 루트를 밟지 못했을 뿐이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역사의 조각으로서의 소시민

역사를 뒤돌아보면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누군가 매를 맞을 대상이 필요했기 때문에 매를 맞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마련이고, 그 사람들은 대부분들이 자신의 작은 삶을 꾸려갈 수 있는 여력만을 가지고 있는, 혹은 그 여력조차 없는 소시민들이다.

후대의 사람들은 기억하지 못하는, 이야기조차 전해들을 수 없는 그러한 소시민들이 작은 조각의 되어 역사를 이룬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저 낮은 중국>은 지금 이 시대의 중국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주고 싶다.

빛이 그림자를 만든다

<저 낮은 중국>은 아마도 중국의 지도계층들이 숨기고 싶은 중국의 그림자일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빛이 그림자를 만든다는 것이다. 빛이 없는 곳에는 그림자도 없다. (사실, 그 때에는 모든 것이 암흑일 테지만) 빛이 있기만 해서 그림자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무언가 빛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있을 때에야 그림자는 그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다. 빛을 가로막는 그 무엇. 그것을 없애면 그림자도 같이 없어질까?

저 낮은 대한민국

우리에게도 낮은 곳은 있고 그림자는 있다. 저 낮은 대한민국. 이 책을 읽고 우리의 ‘날 것’을 그대로 드러내고 싶은 욕구가 비단 나에게만 밀려왔을까? 무언가 까발리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망은 그것을 접했을 때 느낄 수 있는 쾌락과 맞닿아 있다. 사실 나의 이런 욕망도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한다는 그럴듯한 포장 안에 ‘날 것’을 까발린다는 쾌락이 숨어 있는 것이다. 이념은 그 후의 문제이다. ‘날 것’의 아름다움은 바로 그 곳에서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