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는 어디로부터 나오는가?

얼마 전 문득 권위라는 단어를 머릿 속에 떠올려 보았다. 많은 사람들과 사건들이 내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갔고 신기하게도 실타래처럼 얽혀있던 내 생각들이 한 문장으로 정리되었다. 권위는 도구가 아니라 결과다!

내 의지로, 가끔씩은 내 의지와는 별개로 내 인생 대부분(20년이다!)을 학교에서 보낸 나는  셀 수 없이 많은 스승들을 만나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국민학교에 갓 입학해 너무 긴장한 나머지 바지에 직접 볼 일을 보고만 나를 손수 씻겨주셨던 선생님도 생각나고, 국민학교 운동회 리허설 때 친구랑 장난을 치던 나의 뺨을 때려서 입술이 터지게 한 선생님도 기억난다. 왜소했던 형의 교복 바지를 물려입은 바람에 의도치 않게 바지통을 줄인 비행학생으로 오인되어 조인트를 까이기도 했고 (그 전에 입던 바지는 손수 줄이기도 했지만…), 교실 뒤에서 맨날 자던 애가 성적이 잘 나오니 컨닝을 의심 받았던 기억도 난다. 백일장을 준비하던 나에게 글쓰기는 결국 ‘구라 치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신 문학 선생님도 생각 나고, 수업 중에 배가 아파서 화장실에 갔는데 뒤따라 들어오신 선생님이 나의 흡연을 의심하는 바람에 문 하나를 두고 실랑이를 벌였던 기억도 난다. (난 순수하게 볼 일을 보는 중이었다!) 대학에서도, 또 대학원에서도 다양한 교수님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특별히 한 학년에 400명이 넘어갔던 학부 때와 달리 교수님 한 분, 한 분과 긴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대학원에서는 새로운 차원의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운 좋게도, (현재를 포함해서) 좋은 지도교수님들을 모실 수 있었고 실력 뿐만 아니라 삶의 다양한 지혜도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가끔씩은, 이해하기 어렵고, 또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스승들을 마주하게 되는 경우들도 있었다. 이런 경우에 나는 그 분들에게서 심한 불쾌감을 느끼는데 그 이유를 굳이 꼽자면 그 분들의 ‘무례함’ 때문이랄까? 예를 들자면 이런 상황들이다. 말로 할 수 있는 상황인데 굳이 매를 들거나 자신의 신체부위를 활용하여 타격을 가했던 경우. 자신의 손을 리모콘으로 오해하는 경우,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강요하는 경우, 스스로가 하찮은 존재로 여겨질 정도로 비하하고 깔아뭉개는 경우 등.

결국 이런 분들에게 권위라는 것은 도구에 다름 없다. 자신의 언행을 정당화 시키고 다른 사람들, 특별히 자신에 비해 약자인 사람들에게 무례하게 대할 수 있도록 허하는 자유이용권인 셈이다. 결국 시간이 지나 자유이용권의 기한이 지나가 버리면 남는 것은 껍데기 뿐이다. 스스로 취한 권위라는 것은 결국 썩어지게 마련이니깐. 그리고 쌓여 있던 욕과 원망으로 그 속을 채우게 된다. 비단 학교에서 뿐만이 아니다. 스스로 발급한 자유이용권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농락하는 분들이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지 냄새가 진동한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고 운을 띄우는 것도 결국은 값싼 권위를 내세워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것일 뿐이다.

반면에, 아이러니칼하게도 내가 진심으로 권위를 느낄 수 있는 분들은 언제나 겸손하시고 허물 없이 사람들과 마주하시는 분들이다. 얼굴에 완벽하게 정착한 미소, 적당히 이완된 어깨선, 절대로 서두르는 법이 없는 언행, 한껏 드러내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지식과 지혜의 깊이 등이 이런 분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공통적 요소라고나 할까? 이런 분들과 마주하게 되면  내 마음 속 깊이 경외의 마음이 피어오르게 되고, 그 경외의 마음이 그 분들에게 닿으면 권위라는 이름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스스로 취한 권위가 아니라 상대방으로부터, 혹은 공동체로부터 부여받는 권위인 셈이다. 이러한 권위는 지고지순한 과정을 거쳐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한 그루의 나무처럼 뿌리 깊고 견고해서 쉽게 흔들리는 법이 없고 사라지는 경우도 매우 드물다. 한 인생의 결과물로서의 권위인 것이다.

권위는 어디로부터 나오는가? 그 권위가 그것을 도구로 사용하는 쓰레기와 같은 자들이 스스로 취하는 것이라면 쓰레기통으부터 나오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진정한 권위는 어디로부터 나오는가? 그 곳은 겸손하게 또 허물 없이 한 길을 걸어온 그 누군가의 인생 끝자락 어디쯤이 아닐까?

사소해지기

경영 대학원에 다니다 보니 대부분의 수업에 팀프로젝트는 기본 양념으로 뿌려져 있는 경우가 많다. 대학원생으로서, 또 연구자로서 수업에서 다른 동료들의 연구 주제나 프로젝트 주제 발표를 들을 때, 가장 가슴이 갑갑해 올 때는 그들이 너무나도 원대한 비전을 선포할 때다. 이러한 갑갑함은 논문 주제 발표를 들을 때도 마찬가지로 나를 괴롭게 한다. 그럴 때마다 내가 가장 통쾌해하는 교수님의 피드백은 “자네, 그거 하려면 평생을 바쳐서 해도 모질라.” 혹은 “자네가 학교를 오래 다니고 싶으면 해도 좋네.”와 같은 종류의 것들이다. 사실 이 부분은 모든 대학원생들이 마주하게 되는 가장 큰 딜레마이다. 연구의 범위를 좁히자니 내가 왠지 쪼잔한 사람이 되는 것 같고, 또 연구의 범위를 확대하자니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도통 감이 안 잡히는 엄한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오늘 석사 신입생들로부터 어떻게 하면 졸업논문을 잘 쓸 수 있을지에 대해 질문을 받았다. 난 석사 학위 논문을 쓴 사람도 아니고, 연구를 많이 해 본 사람도 아니지만, 짧은 연구 인생을 통해 본능적으로 깨달은 단 한가지 사실을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연구를 할 때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어야 할 최선의 마음가짐은 바로 쪼잔하다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사소해지는 것’ 이다. 영화 “주유소 습격사건”에 나오는 한 캐릭터의 대사처럼 ‘한 놈만 죽도록 패는 것’이다. 멍한 표정으로 내 열변에 귀기울이던 신입생들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사소해지기로 굳게 마음 먹은 듯 보였다.

이야기를 마치고 돌아서는 길에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때도 이런 ‘사소함’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래, 우리들 살아갈 때도 서로에게 ‘그럴듯한 것’만 주려고 하지. 사실 우리가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가장 따뜻한 감동은 ‘그럴듯한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사소한 것’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진심 없이 전달하는 다이아몬드 반지보다는 향기가 피어오르는 따뜻한 꽃밭에서 전해주는 꽃반지가 더 큰 감동을 줄 수 있다. (물론 꽃밭에서 전해주는 진심의 다이아몬드라면 더 좋겠지?) 사소해지는 것. 그 사람의 어깨에 떨어져 있는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주는 일.  길거리 가판에서 고민고민해 선택한 아름다운 머리핀을 선물하는 일. 부모님들에게 하루에 한번쯤은 소소한 이야기를 담아 문자를 보내드리는 일. 이러한 사소함들이 사람들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고, 날카로운 상처를 치료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한 번 해보자는 것이다.

사소해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