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의 외모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

외모는 파트너 선택의 초기 단계에 있어서 최상위 기준들 중의 하나이다. (사실, ‘들 중의 하나’를 빼는 것이 더 현실적이라고 생각하지만!) 문제는 이 Barrier를 쉽게 넘지 못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는 것이다.

“저 사람은 다 좋은데 얼굴이 너무 커!” (내 이야기 아님)
“저 남자는 왜 평소에도 쪼그려 뛰기를 하는거지?”
“저 여자는 코로 숨을 쉴 수는 있는거야?”
“저 사람은 눈을 왜 집에다 놓고 온거야?”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만든 우리에 자신을 가두어 놓고 우리 밖으로 지나가는 이성들에게 점수를 매기는 우스꽝스러운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더 놀라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평생 그 우리에 갖혀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 옆에 동반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조심스럽게 이런 접근 방식을 제안해 본다.

이성의 외모를 판단하는 제 1의 기준!

내가 상대방에게 이쁘다(혹은 잘생겼다)고 이야기 했을 때, 진담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결국 중요한 것은 자존감과 자신감이다. 스스로 상처를 극복하고 콤플렉스를 이겨낸 사람이야 말로 여러분들이 매달려야 할 진정한 미남, 미녀인 것을 기억하라!

권위는 어디로부터 나오는가?

얼마 전 문득 권위라는 단어를 머릿 속에 떠올려 보았다. 많은 사람들과 사건들이 내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갔고 신기하게도 실타래처럼 얽혀있던 내 생각들이 한 문장으로 정리되었다. 권위는 도구가 아니라 결과다!

내 의지로, 가끔씩은 내 의지와는 별개로 내 인생 대부분(20년이다!)을 학교에서 보낸 나는  셀 수 없이 많은 스승들을 만나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국민학교에 갓 입학해 너무 긴장한 나머지 바지에 직접 볼 일을 보고만 나를 손수 씻겨주셨던 선생님도 생각나고, 국민학교 운동회 리허설 때 친구랑 장난을 치던 나의 뺨을 때려서 입술이 터지게 한 선생님도 기억난다. 왜소했던 형의 교복 바지를 물려입은 바람에 의도치 않게 바지통을 줄인 비행학생으로 오인되어 조인트를 까이기도 했고 (그 전에 입던 바지는 손수 줄이기도 했지만…), 교실 뒤에서 맨날 자던 애가 성적이 잘 나오니 컨닝을 의심 받았던 기억도 난다. 백일장을 준비하던 나에게 글쓰기는 결국 ‘구라 치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신 문학 선생님도 생각 나고, 수업 중에 배가 아파서 화장실에 갔는데 뒤따라 들어오신 선생님이 나의 흡연을 의심하는 바람에 문 하나를 두고 실랑이를 벌였던 기억도 난다. (난 순수하게 볼 일을 보는 중이었다!) 대학에서도, 또 대학원에서도 다양한 교수님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특별히 한 학년에 400명이 넘어갔던 학부 때와 달리 교수님 한 분, 한 분과 긴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대학원에서는 새로운 차원의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운 좋게도, (현재를 포함해서) 좋은 지도교수님들을 모실 수 있었고 실력 뿐만 아니라 삶의 다양한 지혜도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가끔씩은, 이해하기 어렵고, 또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스승들을 마주하게 되는 경우들도 있었다. 이런 경우에 나는 그 분들에게서 심한 불쾌감을 느끼는데 그 이유를 굳이 꼽자면 그 분들의 ‘무례함’ 때문이랄까? 예를 들자면 이런 상황들이다. 말로 할 수 있는 상황인데 굳이 매를 들거나 자신의 신체부위를 활용하여 타격을 가했던 경우. 자신의 손을 리모콘으로 오해하는 경우,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강요하는 경우, 스스로가 하찮은 존재로 여겨질 정도로 비하하고 깔아뭉개는 경우 등.

결국 이런 분들에게 권위라는 것은 도구에 다름 없다. 자신의 언행을 정당화 시키고 다른 사람들, 특별히 자신에 비해 약자인 사람들에게 무례하게 대할 수 있도록 허하는 자유이용권인 셈이다. 결국 시간이 지나 자유이용권의 기한이 지나가 버리면 남는 것은 껍데기 뿐이다. 스스로 취한 권위라는 것은 결국 썩어지게 마련이니깐. 그리고 쌓여 있던 욕과 원망으로 그 속을 채우게 된다. 비단 학교에서 뿐만이 아니다. 스스로 발급한 자유이용권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농락하는 분들이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지 냄새가 진동한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고 운을 띄우는 것도 결국은 값싼 권위를 내세워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것일 뿐이다.

반면에, 아이러니칼하게도 내가 진심으로 권위를 느낄 수 있는 분들은 언제나 겸손하시고 허물 없이 사람들과 마주하시는 분들이다. 얼굴에 완벽하게 정착한 미소, 적당히 이완된 어깨선, 절대로 서두르는 법이 없는 언행, 한껏 드러내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지식과 지혜의 깊이 등이 이런 분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공통적 요소라고나 할까? 이런 분들과 마주하게 되면  내 마음 속 깊이 경외의 마음이 피어오르게 되고, 그 경외의 마음이 그 분들에게 닿으면 권위라는 이름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스스로 취한 권위가 아니라 상대방으로부터, 혹은 공동체로부터 부여받는 권위인 셈이다. 이러한 권위는 지고지순한 과정을 거쳐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한 그루의 나무처럼 뿌리 깊고 견고해서 쉽게 흔들리는 법이 없고 사라지는 경우도 매우 드물다. 한 인생의 결과물로서의 권위인 것이다.

권위는 어디로부터 나오는가? 그 권위가 그것을 도구로 사용하는 쓰레기와 같은 자들이 스스로 취하는 것이라면 쓰레기통으부터 나오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진정한 권위는 어디로부터 나오는가? 그 곳은 겸손하게 또 허물 없이 한 길을 걸어온 그 누군가의 인생 끝자락 어디쯤이 아닐까?

사소해지기

경영 대학원에 다니다 보니 대부분의 수업에 팀프로젝트는 기본 양념으로 뿌려져 있는 경우가 많다. 대학원생으로서, 또 연구자로서 수업에서 다른 동료들의 연구 주제나 프로젝트 주제 발표를 들을 때, 가장 가슴이 갑갑해 올 때는 그들이 너무나도 원대한 비전을 선포할 때다. 이러한 갑갑함은 논문 주제 발표를 들을 때도 마찬가지로 나를 괴롭게 한다. 그럴 때마다 내가 가장 통쾌해하는 교수님의 피드백은 “자네, 그거 하려면 평생을 바쳐서 해도 모질라.” 혹은 “자네가 학교를 오래 다니고 싶으면 해도 좋네.”와 같은 종류의 것들이다. 사실 이 부분은 모든 대학원생들이 마주하게 되는 가장 큰 딜레마이다. 연구의 범위를 좁히자니 내가 왠지 쪼잔한 사람이 되는 것 같고, 또 연구의 범위를 확대하자니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도통 감이 안 잡히는 엄한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오늘 석사 신입생들로부터 어떻게 하면 졸업논문을 잘 쓸 수 있을지에 대해 질문을 받았다. 난 석사 학위 논문을 쓴 사람도 아니고, 연구를 많이 해 본 사람도 아니지만, 짧은 연구 인생을 통해 본능적으로 깨달은 단 한가지 사실을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연구를 할 때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어야 할 최선의 마음가짐은 바로 쪼잔하다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사소해지는 것’ 이다. 영화 “주유소 습격사건”에 나오는 한 캐릭터의 대사처럼 ‘한 놈만 죽도록 패는 것’이다. 멍한 표정으로 내 열변에 귀기울이던 신입생들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사소해지기로 굳게 마음 먹은 듯 보였다.

이야기를 마치고 돌아서는 길에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때도 이런 ‘사소함’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래, 우리들 살아갈 때도 서로에게 ‘그럴듯한 것’만 주려고 하지. 사실 우리가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가장 따뜻한 감동은 ‘그럴듯한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사소한 것’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진심 없이 전달하는 다이아몬드 반지보다는 향기가 피어오르는 따뜻한 꽃밭에서 전해주는 꽃반지가 더 큰 감동을 줄 수 있다. (물론 꽃밭에서 전해주는 진심의 다이아몬드라면 더 좋겠지?) 사소해지는 것. 그 사람의 어깨에 떨어져 있는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주는 일.  길거리 가판에서 고민고민해 선택한 아름다운 머리핀을 선물하는 일. 부모님들에게 하루에 한번쯤은 소소한 이야기를 담아 문자를 보내드리는 일. 이러한 사소함들이 사람들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고, 날카로운 상처를 치료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한 번 해보자는 것이다.

사소해지기.

결혼에 대한 단상

오늘 저녁, 대학원 동기 커플의 결혼식에 다녀왔다. 너무나 멋진 장소와 잘 어울리는 신랑과 신부, 감미로운 축가와 맛있는 음식 까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예식이었다. 피로연이 진행되던 중 옆에 앉은 동생과 회사 다니랴, 아기 보랴 정신 없는 삶을 살고 있는 내 아내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마무리 지으며 이런 이야기를 내뱉었다. “못난 남편 만나서 고생하는거지, 머” 둘이서 겸연쩍은 웃음을 짓고 있는데 옆에 앉아계시던 친한 교수님께서 나의 말을 듣고서는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장난으로라도 그런 이야기는 하지 말라” 는 뼈있는 한 마디를 던지셨다. 그 때에는 알겠다며 웃어 넘겼지만, 한참 시간이 흐른 지금에도 그 상황이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그래서 글로서 내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을 정리해보고자 컴퓨터를 켰다.

오늘 예식의 주례사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3가지 이벤트 (탄생, 결혼, 죽음) 중에서 오직 결혼만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부분이었다. 그렇다. 결혼은 선택이다. 나는 누군가는 하지 않은 선택을 했고 그 결과로 사랑하는 사람과 한 가정을 이루었으며 새생명이라는 소중한 선물을 얻었다. 물론 알차게 쓰던 자유시간이 많이 줄어들었고, 신경써야 할 부분들이 곱절 이상으로 늘어나 가끔씩은 뒷골이 땡기기도 하고, 딸아이를 재우느라 잠 못 이루는 밤도 늘었다. 휴일이 되면 연애 시절의 데이트는 이제 더이상 꿈도 꾸지 못하고 집안에서 하루 세끼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나의 선택은 현실이 되었다.  현실은 녹록치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행복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왜 그렇게 결혼을 일찍 했어요?” 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내가 즐겨하는 대답이 있다. “너무 좋아서요!” 이 대답을 들은 사람들은 약간 당황스러워하면서도 아무도 그것의 진실성에 대해 의문을 달지 않는다. 오히려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한다.  그 사람들도 알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니깐 결혼한다는 것을. 다만 이 뒤집어진 세상에서  무언가가 약간 뒤틀려 있을 뿐이다. 조건, 조건, 조건.  그것이 가장 큰 이유가 되어버린 세상이다. 머, 이 부분에 대해서는 부연설명을 달지 않겠다. 쓰자면 밑도 끝도 없이 기분만 상할테니깐.

성경에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서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다. 믿음과 소망, 이 멋지고 순결한 단어들보다 흔하디 흔한 사랑이 더 중요하다고? 부부 간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답의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한다. 내 생각은 이러하다. 부부 간의 믿음? 이 사람이 나를 행복하게 해주리라 믿는 순간, 상대방에 대한 기대는 높아지고 조그마한 실수 하나에도 서운한 마음이 눈 굴러가듯 불어나게 될 것이다. 이 사람이 나를 책임지리라 믿기 시작하는 순간,  책임질 수 없는 상황들이 벌어지기 시작할 것이다. 부부 간의 소망? 이 사람이 언젠가는 변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변하지 않는 상대방의 모습에 실망하고 스스로의 선택을 후회하기 시작할 것이다. 이 사람이 나에게 잘 대해줄 거라는 소망을 갖게되는 순간, 상대방의 작은 무관심에도 배신감을 느끼기 시 작할 것이다. 결국 서로가 만나고 하나의 가정을 이루게 되는 이유는 단 하나, 사랑이다. 다른 어떤 믿음이 필요하지 않으며 다른 어떤 소망도 가질 필요가 없다.

방금 전까지도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설명할 수 없었던 불편함들이 어디로부터 기인했는지 이제는 알 것 같다. 내가 한 저 어리석은 발언은 ‘선택’으로서의 결혼에 대한 의미를 뭉개버린 셈이며, 즉 아내의 선택을 그 근본 뿌리부터 뽑아 흔들어 버린 셈이다. 또 하나는 아내의 ‘사랑’을 ‘믿음’과 ‘소망’으로 오해했다는 것이다. 아내는 무조건적으로 나를 사랑하는데 나는 자격지심으로 스스로를 믿음과 소망의 허울 좋은 철장에 가두어버린 셈이다. 나는, 우리는 서로 사랑한다는 그 이유 하나  때문에 결혼했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끄럽게도!

글을 정리해보자. 결혼은 선택이고 그 선택은 사랑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그 선택 후에 찾아오는 모든 문제들과 어려움들은 단 하나로 해결 가능한데 그것 또한 사랑이다. 따라서 결혼은 사랑의 결실임과 동시에 새로운 차원의 사랑으로의 진입을 안내하는 깃발이 되는 셈이다. 따라서,

결혼하고 싶은 자? 사랑하라! 사랑하고 싶은 자? 결혼하라!

아직 세상에 따뜻한 불씨는 남아있는가?

지난밤에 월드비전에서 보내온 소식지를 한장, 한장 넘기면서 세상에는  아직 따뜻한 사람들이 많이 남아 있구나, 혼자 슬며시 웃으며 내뱉었다. 온갖 세상의 더러운 것들과 부조리의 향연에 진절머리가 나던 참이었다. 사람들은 왜 이리도 이기적인건지, 세상은 왜 이리도 무정한 것인지 아주 많이 화가 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선한 이웃들은 언제나 조용한 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나쁜 악당들은 언제나 조용한 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나쁜 짓을 하고서는 활짝 열린 곳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쳐다보라고 외친 뒤에나 생색을 내고 있지만 말이다.

왜 세상은 점점 더 탐욕스러워지는걸까? 먹고 살기에 충분한 재산을 가진 사람들이 왜 더 많이 가지지 못해서 안달이 난걸까? 충분히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들이 왜 더 높이 오르지 못해 노심초사하고 있는걸까? 충분히 배가 부를 것 같은데도 왜 멈추지 못하고 꾸역꾸역 입에다 음식을 처넣는 걸까? 이것이 시스템의 문제인지, 인간 본성의 문제인지, 아님 이 둘의 상호작용으로 인한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이 거대한 세상이 점점 악취가 진동하는 똥통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위로부터 흘러내리는 온갖 배설물들이 줄기에 줄기를 이루어 땅 속으로 스며들고 있다. 이것이 너무 오래되다 보니 이것이 똥냄새인지 알아채리지도 못하는 사람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제 이 똥같은 상황이 ‘자연스러운’ 것이 되어가고 있다.

아직 세상에 따뜻한 불씨는 남아있는걸까? 위에서 내리는 배설물들을 활활 태워버리고 세상을 더욱더 살만하고 따뜻한 곳으로 만들 수 있는 불씨는 어디에 있을까? 스스로를 돌아본다. 옷이 축축하게 젖을 정도로 냄새나는 것들이 내 몸을 덮고 있다. 피할 수가 없었던 걸까, 아님 피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던걸까? 체념하려던 순간 왼쪽 바지 주머니에 무엇인가가 느껴진다. 급하게 손을 넣어 꺼내어 보니 그것은 작은 성냥갑 하나. 떨어지는 배설물들을 피해 아직은 푸른빛을 발하고 있는 나무 한그루 밑으로 급하게 달려간다. 떨리는 손으로 성냥 한개비를 꺼내어 불을 붙인다. 비틀비틀거리며 금방이라도 꺼질듯이 흔들리다가 이내 중심을 잡고 빠알간 불이 피어오른다.  그리고 주위의 사람들. 누군가는 나와 같은 성냥을 들고, 누군가는 초를 들고, 누군가는 횃불을 들고서 나무 밑으로 모여들기 시작한 작지만 큰 이들이 있었다. 그렇게 작은 불씨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위에서 내리는 배설물들은 더 거세지기 시작했지만, 이제 곧 이 작은 불씨들이 모여 그것들을 태우기 시작할 것이다.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며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이사야 1: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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